캄보디아의 지뢰 박물관:지뢰 하나에 걸린, 한 사람의 목숨
저자:빌 모스(Bill Morse)
빌 모스씨와 아내인 질(Jill)씨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팜 스프링스시에서 20여년 살아 왔습니다. 2003년, 이들 부부는 Aki Ra(아키라)라는 사람이 캄보디아에 있는 지뢰를 제거하는 것에 힘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감명받은 이부부는 아키라 씨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연방법에 따라 501c3 코드로 분류된 지뢰 제거 재단을 자선단체로 설립합니다. 그때부터 빌 모스씨는 캄보디아를 자주 찾아가서, 20여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돌보고 있는 아키라씨를 만나 그를 지원해주기 시작합니다. 2007년. 아키라씨가 지뢰 제거 작업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정부로 부터 받게 되자, 이들부부는 그를 도와 캄보디아에 자주적 지뢰 제거 기구(Cambodian Self Help Demining CSHD)시민단체를 설립하도록 도와줍니다. 2008년 이 단체는 정부의 허가를 받게 되고, 2009년 빌모스씨와 아내 질씨는 캄보디아로 이주하여 활동을 이어갑니다. 아내 질씨는 지뢰 제거 재단의 운영과 프로젝트 등의 자문으로서 힘을 다하게 됩니다.
캄보디아 지뢰박물관 및 아키라 선생
1970년에 태어난 아키라씨는 이곳 주민들이 지뢰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도록 평생을 바친 유명 인물입니다. 그는 5살 때 크메르루주(일명 킬링필드) 정권에 잡혀 35년 동안 여러 군대를 거쳐 전투에 가입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에 이르자, 앙코르 와트 주변지역에 깔린 수많은 지뢰 제거를 위해 그는 유엔과 협력하게 되었고, 2007년에는 캄보디아 지뢰박물관과 구제센터를 설립하였으며 2008년에는 ‘캄보디아 자주적 지뢰 제거 기구’를 창설했습니다. 항상 지뢰 제거 활동의 최전선에서 일하던 아키라씨는2023년부터 그 자리에서 물러나, 박물관 경영에 전력을 다하며 캄보디아인들에게 지뢰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의 지뢰 박물관:지뢰 하나에 걸린, 한 사람의 목숨
I. 총탄 속의 캄보디아: 베트남 전쟁과 크메르 루즈의 부상[1]
미국은1960년대 중엽, 베트남 남북전쟁 중 NVA북월군측에서 병사들의 물자를 남월에 보내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직통하는 군사도로를 건설하자, 이를 막기 위해 캄보디아를 대거 폭격하기 시작합니다. 1970년 이후의 당시 닉슨대통령과 헨리 키신저씨의 결정아래 이곳을 향한 대대적인 폭격이 이루어져, 1965년부터 1973년사이 총 65,000회 이상의 폭격으로 300만톤 이상의 폭탄이 던져집니다.
이 폭격은 캄보디아국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1970년이 되면서 캄보디아 정부는 전복되고, 결국 1975년 4월 17일. 급진적 모택동사상의 크메르(현캄보디아) 정권이 프놈펜을 점령하여 캄보디아를 농업시대로 되돌려 중산층과 상류층을 없애자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크메르(현캄보디아)정권은 나라를 정화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2백만명 가량의 대량 학살을 시행하였습니다. 이 시절에 베트남으로 도망나온 캄보디아인들은 베트남 군대에 지원하여 맞서 싸워, 1979년 1월 7일 크메르(현캄보디아) 정권은 베트남군에 의해 전복됩니다. 이들의 전투는 20년 가까이 되었으며, 가장 많이 사용했던 무기가 지뢰였습니다. 당시 묻혔던 수백만 지뢰에 대한 정확한 위치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말기, 크메르(현캄보디아)정권의 최고 지도자 포르포트씨가 사망하면서, 투쟁은 막을 내리고, 크메르정권은 잔류 세력도 캄보디아군에게 항복하였으나, 전쟁가운데 땅에 묻힌 수백만 개 지뢰는 주민들의 안전과 생명을 언제나 위협하게 됩니다.
II.캄보디아 지뢰 박물관의 연혁
1990년대 초에 설립된 캄보디아 지뢰 박물관은 소년병으로 징병 된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지뢰와 불발탄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관람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아키라, 가족과 함께 지내던 5세 시절. 그는 종족 대학살을 자행했던 크메르(현캄보디아)정권에 납치되어 10살 때 소년병이 됩니다. 크메르정권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를 통치, 그는 당시의 급진적 공산주의 운동에 휘말려 무장병으로 싸우면서,후에 체포되어 강제로 베트남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198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면서 그는 다시 캄보디아의 정규 병사가 됩니다.
1990년대 초부터 그는 지뢰 제거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땅에 묻어둔 위험한 무기를 제거하는 데 능숙하다는 것을 익히 알았고, 그로부터 그는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 내기 시작하며 항상 지역 주민과 경찰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자기땅에서 주민들이 안전하게 지내게 하는 것'만이 그의 명확한 목표였습니다.
아키라 씨가 최초로 설립한 박물관은 씨엠립강 연안의 같은 이름 도시 ‘씨엠립’에 위치하여, 울타리로 둘러싼 나무 목조로 만든 건물이었습니다. 아키라씨는 언제나 한결같이 지뢰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가서, 손수 제거 또는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이용하여 폭파시켰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부로 부터 허가를 받지 않아, 가끔 지역정부와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아키라씨만 시골마을에서 지뢰를 제거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뢰 제거를 하려는 이들이 폭발되어 피해를 보거나 사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는 동안 여러 명의 고아들과 버림받은 아이들, 지뢰로 인해 상처를 입은 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히며 학교도 보내주었습니다.
2007년. 그가 설립했던 박물관은 토지 소유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그가 회수한 탄약이나 무기 등이 정부의 검열을 거치지 않아 안전성에 대한 인증이 없다고 하여, 박물관은 문을 닫게 됩니다. 그 후 한 캐나다 기관의 도움을 받게 되어 이 박물관은 앙코르 와트 국립공원 내의 반테아이 스레이에 있는 현재 위치로 이전하게 됩니다. 새로 지어진 건물에서는 지뢰로 인해 피해자가 된 12명 이상의 고아와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수용하는 곳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2018년 정부 측이 무허가 수용소를 검거하기 시작하면서 박물관에서 지내던 어린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정부가 승인한 시설로 보내졌습니다.
III.제도화 되어가는 과정:캄보디아 지뢰 박물관 및 그의 NGO자매기관
2003년. 지뢰 제거 재단으로 부터의 지원
아키라 씨는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기 위해 NGO비정부기관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2003년, 전직 미육군의 위임 장교로 있던 빌 모스씨가 캄보디아 정권의 병사로 있었던 아키라 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아키라씨가 기발하게 친히 손수 지뢰를 제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아내 질씨와 아키라 씨를 만나러 캄보디아의 씨엠립을 찾아가 아키라 씨를 만나고 그가 하는 일에 대해 깊이 알게 됩니다. 아키라씨를 만난 이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 본사를 둔 501c3 자선 단체인 ‘지뢰 제거 재단(Landmine Relief Fund)’를 설립하여 지속적으로 아키라 씨가 하는 일들을 지원하게 됩니다.

빌·모스씨와 그의 아내 질 씨
2008년. 이어서 캄보디아의 자주적 지뢰 제거 기구(CSHD)창설
‘지뢰 제거 재단’의 도움 아래, 아키라 씨는 정부로부터 허가증을 취득 후 정식적인 체제하에서 작업하기 위해 지뢰 제거팀을 조직하게 됩니다. 그는 재단에서 부담한 자금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정규 훈련을 받아, 지뢰 제거 전문가 인증을 취득하여 지속적으로 전문지식을 익혀가면서, 마침내 캄보디아 정부로 부터 승인을 받은 프로페셔널리스트가 됩니다. 정부의 승인을 얻은 후2008년에 캄보디아에 자주적 지뢰 제거 기구(CSHD)를 창설하고, 2009년부터2023년까지 책임자로서 일하며, 퇴직 후에는 지뢰박물관 운영에 심혈을 다하고 있습니다.
IV. 지뢰 제거의 부단한 작업과 주민들을 향한 교육
캄보디아 지역에는 지뢰는 물론, 불발탄, 폭탄, 박격포탄, 대포탄과 ‘전쟁 시 잔류한 폭발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어, 정기적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망과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1990년대에는 해마다 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2023년에는 40명 이내로 감소하였습니다. 이는 부단한 지뢰 제거 작업과 주민들을 향한 교육에 힘입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단계: 지뢰지역의 제거작업
현재 캄보디아의 ‘자주적 지뢰 제거 기구(CSHD)’는 지뢰 제거팀 1 팀과 폭발물 처리(EOD)팀 2팀, 폭발물 위험 교육팀 1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마을과 학교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의심스러운 물질에 대해 알아가기, 표기하기, 신고방법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뢰 제거팀은 약 9백만 제곱미터의 땅밑에 깔려 있던 250개 이상의 지뢰밭을 제거했습니다. 말 그대로 수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던 땅에서 그들을 살아서 돌아가게 한것입니다.
CSHD기구는 2008년부터 지뢰밭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제거한 대부분의 지뢰밭은 태국과 캄보디아가 이어진 국경에 있는데,이는 1965년에서1973년 사이, 미국이 대거 폭탄을 이 지역에 투하했고, 캄보디아 정권이 참호로 이용하여 진을 치고 있던 곳이어서, 전투가 중지된 1990년대 후반까지도 이곳에 주민들의 인프라를 건설하는 것은 아주 어렵거나 불가능했습니다. 한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사례를 든다면 마을 촌장으로 있던 ‘동-통’씨가 CSHD기구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이유는 그 마을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두명의 여성 교사가 있기 때문에 작게 나마 학교 하나를 나무로 지어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바닥으로 하여 그위에 조촐한 목조 건물의 학교를 짓는 데 팀원들은 약 한 달정도 걸렸습니다.
그리고 지뢰 제거 재단에서 지원해준 돈으로 학생들의 학용품을 구매하고 교사에게 소액의 수당을 지급할 수 있었습니다. 지은 지 1년도 안 되어 새로 부임한 교육부 장관은 이 학교건물에 승인 허가를 내주어, 학교 시스템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승인받은 교사를 채용할 수 있었고 학생들은 정식적인 학교 체제 안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단계:2019년에 또다시 창설한 NGO자매기구 ‘농촌학교 건설단체’를 통한 농촌학교 건설
‘지뢰 제거 재단’은 장기적으로 CSHD(지뢰 제거 기구)를 도와 농촌 학교 건설에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2018년. 농촌학교 건설사업이 커지면서, 독자적인 별도의 시민단체로 성장하여, 지뢰 제거 기구로부터 독립된 농촌 학교 건설을 전문으로 하는 기구 즉 농촌학교 지원 기구(Rural School Support Organization(RSSO))로 2019년에 탄생됩니다. 농촌학교 지원기구(RSSO)는 2024년 4월까지 7개 도시에 32개 학교를 건설하여 약 4천명의 초등학교 학생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도왔으며, 아울러 여러 마을과 협력하여1헥타르의 땅을 얻어 학교를 지어주기로 합니다. 마을에서 학교를 짓는 데 필요한 허가를 받으면 지뢰 제거 재단에서 학교 건물을 세우고 책상, 칠판, 교과서를 갖추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게 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학용품도 제공합니다. 설비를 갖춘 4개의 교실을 짓기 위해 3만 달러의 자금이 필요합니다.
2019년 RSSO기구에서는 주민들에게 유기농 작물 재배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 농장 “The Together Project”를 실시하였습니다. 주민들에게 수경 재배와 온실 재배, 버섯 하우스 재배를 가르치는 비용은 모두 지뢰 제거 재단에서 부담하여, 주민들은 무료로 수업을 받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어린시절 지뢰박물관에서 자라나 성장하여 ‘로열 농업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제안 한것입니다. 그는 지금 해당부서를 담당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V.캄보디아 지뢰 박물관의 현황
박물관은 연못을 가운데로 두어, 이를 둘러싼 4개의 갤러리가 있는데, 연못 중앙의 정자를 통해 유리 안에 있는 러시아, 중국, 미국, 동독, 베트남, 캄보디아, 구소련 공화국에서 폐기한 지뢰 수천개가 빽빽이 쌓아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모두 아키라씨와 그의 지뢰 제거팀이 제거한 지뢰들입니다.
박물관내부에 진열된 지뢰들
박물관내부에 진열된 지뢰들
지뢰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은 나날이 늘어났으며, 해외에서 온 관람객에게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는 지뢰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다국어 해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제공한 것이 7개국의 언어로 만든 안내서였습니다. 지금은 갤러리마다 스캐닝이 가능하도록 QR코드가 설치되어, 영어를 비롯한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설명이 돼 있으며, 투어 가이드를 통해서 캄보디아어와 영어로 캄보디아의 분쟁의 역사, 지뢰를 사용한 상황이라든가 전쟁 시 있었던 그 밖의 폭발물과 현지 주민들이 오랜 세월 동안 겪었던 위협들에 관해 설명하기도 합니다.
또한 캄보디아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는 내용과 해외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는 내용도 무척 다릅니다. 해외 관람객들에게는 캄보디아지역의 지뢰에 관한 역사와 지뢰 제거 작업의 과정 등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현지의 캄보디아 관람객들에게는 “지뢰의 위협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야외에 나갔을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사항이나, 위협을 분별하는 방법, 그리고 표기해 두는 방법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점 등을 중점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VI.박물관이 직면한 도전과 비전
캄보디아는2030년말까지 이미 알려진 지뢰지역의 지뢰완전 제거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 시점이 되고 나면, 전국각지에 널려 있는 수십만, 아마도 수백만개의 불발탄(UXO)의 파편들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1918년에 끝난1차 세계 대전시 남겨진 불발탄(UXO)은 지금도 세계 각곳에서 제거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도 수년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캄보디아의 내전은1990년대 후반에야 종결되었으며, 전쟁을 경험하며 성장한 사람들은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도 선전포고를 한적없는 캄보디아는 단지 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에 휘말려 35년간 전쟁 중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전문직의 도움 없이는 쉽사리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
전쟁이라는 것, 특히 지뢰라는 것이 어린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생히 상기시켜주는 곳이 바로 캄보디아 지뢰 박물관입니다. 이것을 수백만 배로 곱하면 지난 60여년간 겪어온 캄보디아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박물관 자체는 아주 소박합니다. 한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가 다 같이 더이상 이 세상에서 지뢰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박물관을 지은 초심이었습니다. 정부나 재단에 의해 수백만 달러를 지원받아 지은게 아니고, 기부금과 입장료 수입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박함은 세계 각지에서 온 관람객들의 마음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정부는 박물관의 운영을 승인하였고,그 후 캄보디아 국내에 있는 여러 지뢰 제거 단체와의 밀접한 협력도 이루어졌습니다. 아키라씨도 자신의 업적으로 세계 여러나라로 부터 상장을 받았습니다. 2010년에는 미국 CNN방송사로 부터 “세상을 바꾼 사람” 으로 선정된 1만 명 이상의 후보 명단에서 10 대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받았으며, 2012년에는 대한민국 만해대상식에서 평화상을 수상 받았습니다.
유럽계 저자인 빌에게 누군가 질문하였다고 합니다. 당신은 캄보디아인이냐고? 당시 빌 모스씨는 이렇게 답변하였다고 합니다.“저는 미국인이며 독일인이고, 중국인, 호주인, 러시아인으로, 이 행성에서 살고 있는 어린 아이라고.” 하면서, 다시 되물었다고 합니다. “내 답변에 동의합니까?” 그러자, 상대방(그녀)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러자 빌 모스씨는 “당신도 나의 여동생같다고, 그러니까 나를 오빠처럼 생각하라고…우린 모두 형제자매같으니까, 서로 같이 길을 가다 한사람이 넘어지면 자연스럽게 부추겨 주고 싶은 게 우리의 심정이고,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캄보디아 지뢰 박물관에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1]캄보디아 크메르정권은 모택동사상의 영향을 받아, 농업사회 주의를 주장하는 급진적 사상을 옹호하여 일당 독재로 정권을 다스리며, 모든 사유 재산을 몰수하는 등 현대적 도시건설과 서구식 사상을 반대함. 출처: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의 "크메르 루즈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