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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로힝야인—공동체를 위한 추모와 정체성 보존

저자 소개:라이스‧티망 

캐나다 토론토 출신의 로힝야인 라이스‧티망(Raïss Tinmaung)씨는 로힝야 인권을 위해 많은 캠페인 활동과 청원, 집회 등을 이끌어 오면서 각 지역에 새로운 지부를 편성하고, 소셜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거나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해 온 “로힝야 인권 네트워크”의 창립자이자 의장님입니다. 아울러, 로힝야 대표단을 이끌고 캐나다 의회를 비롯한 인권박물관 · 몬트리올 홀로코스트 박물관 · 퀘벡 국립미술관 · 유엔의 미얀마 독립 조사 기구 (Independent Investigative Mechanism for Myanmar,IIMM) · 국제사법 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ICJ)에 출석하여 연설해 왔습니다. 모금단체의 책임자이기도 한 라이스씨는 버마(미얀마),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등지에 있는 로힝야인과 로힝야 디아스포라를 위한 교육과정과 직업 훈련 프로그램을 지원해 오며, 로힝야족 공동체를 위한 아이티, 에콰도르 및 남아프리카 지역의 장기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로힝야인을 위한 인권 네트워크 

로힝야 인권 네트워크(Rohingya Human Rights Network)는 각 지역에 흩어진 로힝야인 커뮤니티 또는 지원을 해주는 로힝야인으로부터 지원 받고 있는 관련 민간단체들과 난민캠프나 마을에 사는 연설자, 글 쓰는 이들, 인권 상황 기록자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입니다.  

로힝야 인권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글을 발표하고, 인터뷰했던 영상의 제작이나, 인권 이슈에 대한 기록, 정책 제정자들의 방문, 청원서를 통한 탄원 요청, 대중 연설을 개최하거나 참여하고, 평화적인 집회의 주최, 미디어 잡지에 투서 등, 여러 민간 단체와도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팀원들은 로힝야 공동체에 관한 문제들을 수집하고 편집, 출판/방송하여, 난민캠프와 마을에 있는 로힝야인들이 지역사회의 문제점과 인권 이슈에 대한 내용의 동영상을 직접 만들고 있습니다. 아울러, 여러 곳으로부터 로힝야 생존자들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고 있으며, 지금은 이를 대화형 웹사이트로 만들어, 로힝야 인권 네트워크 운영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웹사이트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미얀마의 로힝야인—공동체를 위한 추모와 정체성 보존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서술 

로힝야족은 8세기부터 미얀마 북서부의 라카인[1] 지역에 살고 있었던 소수민족으로, 종족 상으로는 동인도족의 후예[2] 에 속하여, 미얀마 지역에 사는 전체 버마족과 라카인 지역에 사는 라카인족과는 조금 다릅니다. 대부분이 불교도 [3]인 라카인족이나 버마족과는 대조적으로, 로힝야족들은 대다수가 무슬림이며 힌두교와 기독교 신자도 일부 있습니다.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로힝야족, 아라칸족, 버마족(미얀마족), 기타 소수민족은 수 세기 동안 평화롭게 공존했습니다. 

1948년 미얀마가 독립했을 때만 해도, 로힝야족은 사회적으로나 경제, 정치적 영향력 등 모든 면에 대우를 받았고, 이미지도 좋았습니다. 국가의 라디오 방송에도 로힝야 프로그램이 있었고, 양곤대학 등 명문대학에서도 로힝야 학생회가 있었으며, 정부 고위직에도 한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버마군(미얀마군)의 연합 참모차장 아웅기(Brigadier General Aung Gyi)준장은 한 연설에서 “로힝야족은 정식적으로 평등한 미얀마 시민이며 버마 공화국의 분할될 수 없는 민족”이라고 말했습니다.”[4] 

1962년 버마(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라카인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종족 간 긴장은 급속히 고조되었습니다. 1978년, 국가가 이끈 공포의 테러 행동은 20만 명의 로힝야족을 고향을 떠나 방글라데시로 피신하게 하였고, 1982년, 이른바《미얀마 시민권법》 시행은 하룻밤사이에 로힝야족들을 무국적자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국가적으로 승인한《미얀마 시민권법》은 로힝야족으로 하여금 차별 정책의 표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로힝야족은 이동하는 데도 제한을 받았고 교육과 생계에도 영향이 갔으며, 사업의 운영이나, 재산 소유에도, 수시로 정부에게 몰수당할 우려가 있었고, 의료 서비스의 이용은 물론, 결혼 증명서 취득이나, 심지어 자녀 출산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 당국은 로힝야족을 마음대로 체포, 강탈, 구금, 위법적인 살해를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nigger(니그로)"라고 멸시했듯이, 미얀마에서는 경멸적인 용어로 "kalar(칼라르[5])"라고 로힝야족을 불렀습니다. 승려들과 고위급 종교 인사[6]도 로힝야족의 몰살을 촉구했고, 버마의 소셜미디어에는 '빌어먹을 칼라르들 입에 돼지기름을 채워라'라는 등 로힝야족을 향해 '종족 전체를 말살해라',  '기름으로 불질러서 하루빨리 그들이 알라신을 만나게 해라.”[7] 라는 말들이 오고 갔습니다. 

1992, 2012, 2016, 2017년 정부의 주도하에 일어난 폭력과 방화로 인해 로힝야족 마을의 수십만 명은 미얀마를 떠나 방글라데시의 난민 캠프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2017년에 있었던 “인종청소 작전”은 로힝야 마을의 절반에 달하는 400개 마을을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85만 명에 달하는 로힝야족은 방글라데시로 피신해야 했고, 생존자들은 어린이들이 산채로 불타고, 여성들이 집단 강간을 당한 이야기와 노인과 장애인들이 칼에 찔려 죽는 공포의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습니다.  2019년 미얀마정부는 유엔의《대량학살 방지협약(UN Genocide Convention)》을 위반한 혐의로, 최고법원인 국제사법 재판소에 넘기었습니다. 2020년 국제사법 재판소는《대량 학살 방지 협약》제2조 규정에서 금지된 모든 행위의 재발 방지를 위해 미얀마 정부에게 “자신의 권한 내에서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조치를 취하라”[8]고 명령했습니다. 

2020년 로이터통신 기사 – 피난민이 떠난지 3년 후, 로힝야족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짐.

2020년 로이터통신 기사 – 피난민이 떠난지 3년 후, 로힝야족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짐.

로힝야족을 거부한 미얀마 정부 당국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의 존재를 부인하는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1982년. 《미얀마 시민권법》이 통과되면서, 공식적인 입장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 정부 당국은 라카인의 로힝야족 마을을 집마다 방문하여 1982년 전에 발급된 신분증과 증명서류를 강제로 압수하면서, 대체용 문서 또는 주민등록증을 발급하여, 그 위에 "벵골인"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2019년, 미얀마의 국가 고문으로 있던 ‘아웅산 수치’여사가 미얀마 정부를 대표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출석하여 항변했을 때도 그녀와 미얀마 대표단 모두가 로힝야인을 '불법 멩골인[9]'이라고 하며, 로힝야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2020년 미얀마 정부의 공식 지도 작성 기구 ‘연방 정부 총무부 (GAD)’는 공식 지도상에서 2017년에 불에 타 소실된 모든 로힝야족 마을의 이름을 삭제했습니다. 이를 뒤로 하여, 유엔의 미얀마 지도 담당 부서 (Myanmar Information Mapping Unit)도 이를 따라 수정[10]하였고, 그 다음에는 Google Maps, Bing, Map box, Esri 등 인기 지도 플랫폼들도 자연스럽게 미얀마 정부와 UN의 MIMU는 지리공간 정보의 권위 있는 출처라고 믿고 있어, 멸종된 로힝야족 마을의 이름을 모두 삭제해 버렸습니다. 

로힝야족이 고향을 버리고 미얀마를 떠나며 근절되기 까지, 미얀마 정부와 극단주의 불교 지배 집단들이 아주 크게 한몫했습니다.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로힝야족 마을의 절반 이상을 불태웠고 백만 명에 가까운 로힝야족을 쫓아냈습니다. 이중 수천 명은 인신매매 전용보트를 타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로 탈출하려다 안다만해를 지나면서 사망하여, 전 세계 350만 명의 로힝야족 가운데 60만 명이 미얀마에 남게 되었고, 이중 13만 명이 ‘국내 실향민들(Internally Displaced Persons)[11]’전용 캠프에 살게 되었습니다. 현재 미얀마 사회에서는 ‘로힝야’라는 단어를 아무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로힝야족은 생존의 위기에 시달릴 뿐 아니라, 정체성과 역사적 기억마저도 말살 되어 가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추모 그리고 정체성 보존 

로힝야족의 대대적인 말살의 거친 파도속에, ‘로힝야 인권 네트워크’는 방글라데시 난민 캠프에 있는 로힝야 시민단체, 미얀마 마을에 남아 있는 생존자들과 뜻을 같이하여, 로힝야 마을에 관한 지리정보를 디지털 형식으로 보존하는데 힘을 모았습니다. 로힝야인들이 미얀마에 살았었다는 과거의 기록들, 고향에 대한 추억과 정체성이 담긴 모든 미디어 정보 및 영상소재를 수집하는 작업을 위해, 4단계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1 단계: 2020년전까지 인정되었던 지도 자료를 이용하여, 미얀마 국내의 모든 로힝야 마을, 불살라 버린 로힝야 마을까지 포함하여 찾아낸 것들을, 온라인상의 지리정보 데이터베이스에 저장. 

그림 예시— 지리정보 지도상에 불타버린 마을들을 표기.

그림 예시— 지리정보 지도상에 불타버린 마을들을 표기.

말살된 마을의 데이터 정보에 생존자들의 주민등록증을 첨부.

말살된 마을의 데이터 정보에 생존자들의 주민등록증을 첨부.

2단계: 전체 로힝야 인구를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 각마을에 존재했던 흔적을 찾아, 향후 양심 유적지(sites of conscience)로 만들 수 있는 추모적 물품이나, 묘지, 무슬림교당, 학교, 「Madrassas(마드라사스) 이슬람신학교」· 진찰소/약국 등을 찾아냄. 

3단계: 학살속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각 마을에 생존한 이들의 이름과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한 전체적 조사를 실시. 

4단계: 사라진 각 마을의 데이터에 수집한 정보들을 추가 후, 전 세계에 산재한 로힝야족과 인권 커뮤니티에 공유. 

말살된 마을 데이터 정보에 생존자들의 증언 영상을 추가.

말살된 마을 데이터 정보에 생존자들의 증언 영상을 추가.

이러한 단계별 작업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모든 과제를 커뮤니티의 주도하에 시행하는 것으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정보 자료를 처리하는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교육 훈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학습을 위한 교육 훈련 전문가와 도구나 장비 등이 필요했습니다. 

난민 캠프 내에서 작업을 하는 것 자체도 어려웠습니다. 갱단과 마약으로 인해 폭력이 범람하면서, 정보의 수집이나 홍보 활동은 지난 수년간 점점 더 제한적이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어려운 건 미얀마에 몇 안 되게  남아 있는 마을에 접근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미얀마 군부의 ‘인종 격리 정책’은 로힝야족들이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이동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 우리는 어떠한 협력 활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상황에 정부군과 소수민족의 무장단체들이 전투를 하여, 로힝야족에게도 영향을 미쳐, 미얀마에서의 인권기록 활동은 극도로 어려워졌습니다. 

아울러, 로힝야난민이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전체 인구를 조사하는 활동은 큰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로힝야들은 방글라데시를 비롯하여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에도 많이 산재해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점점 많은 난민들이 미국에 가서 정착할 기회를 찾고 있으며, 북미, 유럽, 호주에도 소수의 난민들이 흩어져 지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막대한 규모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가장 큰 어려움이라면 역시 자금조달입니다. 로힝야족의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막대한 작업 활동이기 때문에 특별팀과 자원봉사장들을 필요로 하며, 효과적인 업무 수행을 위해서는 인원들의 급여 지급과 인원 훈련용 도구, 장비와 시설 등을 갖추어야 합니다. 수집된 정보들을 유용하게 재정리하기 위해서도 자금이 필요합니다. 

맺음말 

로힝야인 커뮤니티가 추진하려는 추모 및 정체성 보존에 대한 움직임은 로힝야인의 역사나 문화적으로 의미 깊은 유적지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이 결과물들은 로힝야인들이 자신의 고향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고, 자신의 문화유산과 민족 정체성에 대한 로힝야인들의 노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결과물들은 국제 인권 커뮤니티에도 교육과 홍보의 도구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뿐만아니라,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 있는 100만 명의 로힝야인에게 평화와 소통의 길을 열어주고 송환작업에 힘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언젠가 라카인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갈망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향후 책임 규명을 위한 특별 조사에서도 특정 정보로 이용하여 사법기관이 개별적인 사건 조사를 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움직임이 로힝야족 스스로 주도한 것이고 운영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일들을 스스로 장악하였다는 점에서 커뮤니티의 역량을 세웠을 뿐아니라, 아주 모범적인 실례로서, 현존하는 로힝야인들은 물론 후손들에게도 크나큰 자부심과 영향을 줄 것입니다.  


[1] 월스트리트 저널 "역사: 미얀마의 로힝야 소수민족"〉 

[2] 소수민족 권리단체(Minority Rights Group)—〈미얀마의 무슬림과 로힝야인〉

[3] 하버드 신학대학원 - 종교와 공공생활에 관한 연례 보고서 "미얀마의 갈등" | 

[4] Zarni의 블로그(Zarni's Blog)|〈1961년 7월. 미얀마 군 지도자 발표: "로힝야족은 공식적으로 평등한 시민으로 미얀마 연방공화국과 분할될 수 없습니다."〉 (maungzarni.net) 

[5] 프랑스 24(France 24)〈「제발 칼라르라고 부르지 마세요.」:흑인의 목숨도 목숨이다.(Black Lives Matter,BLM)미안마까지 전달된 투쟁의식.〉 

[6]〈공개적으로 군부를 지지한 미얀마 승려들〉(foreignpolicy.com) 

[7]〈Facebook을 통한 미얀마의 혐오 언론들이 점차 입지를 잃은 이유〉 (reuters.com) 

[8] 유엔 미얀마 문제 독립조사기구(IIMM)|〈국제 재판소—감비아 미얀마를 향한 기소 제기〉(un.org) 

[9] 알자지라 방송사 | 로힝야족 특집 | "국제사법재판소는 아웅산 수지가 소수민족을 지칭하는 데 '로힝야족'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판결.  

[10] 카라단 신문망 (Kaladan Press Network) | "로힝야족 국회(ARNO): 유엔은 미얀마 정부의 뜻을 따라, 유엔의 MIMU 지도에서 로힝야 마을을 삭제." 

[11] 인권시찰 |〈「국경없는 투옥」:미얀마의 로힝야족들 대규모 감금〉